北韓軍의 南侵으로 韓國戰亂(6.25)이 발발한지 사흘만에 首都서울이 落城되는 위기상황서 陷落허루전인 6월27일밤 李承晩대통령은 예정에 없던 그 특유의 약간 떨리는 목쉰소리로 『용감한 우리 國軍이 38선을 넘어 南侵한 北韓軍을 격퇴하고 북진중이니 국민은 동요하지 말라』는 내용의 對國民聲明을 예정에 없던 라디오生放送으로 발표했다. 이 生放送은 李承晩대통령이 서울을 抛棄하고 南下하다가 水原에서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이 生放送을 마치고는 남으로 황급히 줄행낭을 치고 말았다. 그러나 전황을 알수없어 불안에 떨다가 생방송을 듣고 다소남아 마음을 놓았던 서울시민들은 끊이지 않고 점점 가깝게 들려오는 砲聲에 밤잠을 설치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서울은 어느새 붉은 천하가 되어 버렸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정부에 대한 조그마한 信賴가 일시에 憤怒로 돌변하고 말았다. 李대통령의 방송을 듣고 서울에 남아있던 민족(우익)진영의 수많은 사회지도급인사들이 北韓軍에 체포되어 피살당했거나 납북되어 아직까지 생사조차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李대통령의 欺瞞放送만 아니었드라도 희생자중 상당수는 미리 피난길에 올라 화를 모면했을지도 모른다. 피해자가 당한 고초는 말할것도 없고 그들의 가족은 애절한 이산의 한을 가슴에 묻고 반세기이상을 살아왔다. 나도 그중 한사람이다. 개인적인 한이나 고초를 제쳐 놓고라도 그로인해 국가와 사회가 겪은 인력손실은 실로 헤아릴수 없이 컸다.
서울시민을 死地에 방치하고 도망치면서 동요하지 말라고 欺瞞한 거짓말放送은 李承晩대통령이 12년간의 집권기간중에 저지른 많은 失策중 가장 결정적인 失策중의 하나로 두고 두고 문제되었다. 존경받던 건국대통령이 國父의 자리에서 국민을 기만하는 노회한 집권자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가 아니었을까?
韓國戰亂초기 軍이 국민을 기만한 허세와 전과조작발표를 일삼은것은 이외에도 일일히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다. 戰亂이 발생하기전에 군지휘관이 방송(그당시는 TV가 없었음으로 라디오)에 나와 北進統一을 왜쳐대면서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우리國軍은 서울서 아침먹고 38선을 넘어가서 一路北進하여 平壤에서 점심먹고, 新義州서 저녁을 먹을것이다. 우리國軍은 그정도로 萬全의 準備態勢를 갖추었고 莫强한 戰力을 지녔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의 豪言壯談에 속은 국민은 平壤서 점심 먹고 新義州서 저녁 먹을 정도로 國軍이 破竹之勢로 밀고 올라갈 것이라고 굳게 믿었으나 막상 6.25기습남침을 당하자 단사흘만에 首都서울을 내줄 정도로 國軍은 장비도 형편없고 훈련도 제대로 안된 허약한 烏合之卒이었다.. 그런 과정에서도 戰亂勃發 다음날인 26일에는 불리한 전황을 숨긴채로 『瓮津半島에 주둔중이던 17聯隊가 남침한 北韓軍을 격퇴하고 응징추격하여 海州를 점령했다』고 허위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같은 李承晩대통령의 對國民欺瞞放送과 戰亂前 군지휘관의 터무니없는 虛風, 그리고 거짓戰果發表는 南侵한 北韓이 『韓國戰亂은 南側이 선제월경공격으로 일으킨 것이라』는 억지주장을 펴며 뒤집어씨우기로 나오는 빌미로 惡用되기도 했다.
西海交戰(이 用語는 부정확한 呼稱이지만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 어쩔 수없이 쓴다) 8일만에 國防部가 이번 사태의 진상조사결과를 발표했는데 國防部의 조사발표에 접하면서 聯想된것은 바로 李承晩대통령의 對國民欺瞞放送과 그당시 군의 거짓 戰果發表였다.. 奇襲越境挑發의 여러 徵候를 사전에 포착하고 北韓警備艇의 越境挑發을 미리 예방하고 차단하지 못했다는 정보분석판단의 소홀을 어쩔 수없이 인정하면서도 國防部의 발표는 군인답지 못한 구차한 責任回避와 辨明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死亡 5명이라는 첫 被害報告서 死亡의 「亡」을 「傷」으로 잘못 들어 사상 5명으로 해석하고 被害가 輕微한 것으로 오판했다는 첫대목부터가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다.. 死亡 5명은 莫甚한 被害이고 死傷 5명은 輕微한 被害라는 인식부터가 문제다. 重武裝對峙의 休戰狀況에서 상대측이 不法越境하여 銃擊을 가했다는 것 자체가 우선 중대한 挑發인데다가 상대측의 銃擊에 의해 우리측이 人的被害를 당한 것은 결코 輕微한 被害라고 할수 없다. 더구나 死傷이라고 하면 죽은 사람이 있다는 뜻인데 이를 輕微하다고 판단했다니 한마디로 言語道斷이다. 생명은 숫자에 관계없이 귀중한 것이다. 1명이든 5명이든 10명이든 생명을 잃었다면 큰 피해인 것이다. 死傷 5명이라면 死亡者가 최소 1명에서 최대 4명까지로 예상할 수 있는데 死傷 5명을 輕微한 被害로 판단한 지휘관의 被害基準(輕微한 被害와 莫甚한 피해의 구분점)은 무엇인가 몇명이 죽어야 莫甚한 被害라는 것인가. 아무리 군인이라고 해도 인명을 이렇게 경시하는것은 묵과할 수 없다.
경황중에 「亡」을 「傷」으로 잘못 알아들어 死傷 5명으로 보고받았다는 내용도 도무지 말이 안된다. 戰鬪狀況의 被害報告가 이렇게 애매모호한 주먹구구여서는 안된다. 피해보고는 死亡 몇명, 負傷 몇명(여기서도 重傷과 輕傷을 확실하게 구분해야한다) 失踪 몇명식으로 될수 있는 대로 六何原則에 의해 상세하게 분류하는 것이지 다친 사람과 죽은 사람을 뭉뚱그려 死傷 몇명 하고 주먹구구로 하지 않는 것이다. 설사 보고자가 死亡 5명이라고 한 것을 피보고자가 사상으로 잘못 들었다고 해도 死亡 5명이라고 전한 보고자는 다음에 부상자 몇명이라고 댔을 테니까 死亡을 死傷으로 잘못 들은 것은 뒤이어 나온 負傷 몇명이라는 후속보고에 의해 착각이었다는 사실이 즉석에서 곧바로 밝혀졌을 것이 아닌가. 死亡이 死傷으로 둔갑한 착오가 발견된 시점이 언제였던 것도 國防部의 발표서는 어물쩍 넘어갔다. 첨단무기를 다루는 國軍이 유치원 어린이들이들이 전쟁놀이하듯 이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인가. 유능한 지휘관이라면 死傷 5명이라는 첫피해보고를 받고 『그렇다면 몇명이 죽고 몇명이 다쳤느냐?』고 되물었어야만 했다.
이러한 경과를 거치지 않았다면 우리 國軍은 완전히 개판이고 긴급한 상황서는 언제나 판판이 주어터지고 깨질 수밖에 없다.
아-, 어찌할꼬? 嘆息이 절로 터진다.
첫보고과정서 死亡이 死傷으로 잘못 전해졌다는 발표내용은 진상조사를 마쳐야 한다는 구실로 일단 급한 국면을 피해 놓고는 사태의 진상파악과 규명은 제쳐톻고 문책범위와 축소, 징벌수준의 조정을 위해 1주일동안 잔머리를 굴린 끝에 찾아낸 責任回避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치 않을수 없다.
境界線을 침범한 北韓警備艇을 돌려보내기 위해 출동시킨 高速艇은 정황을 파악하고 상대측의 동정을 살피기 위한 것으로 陸戰에서는 斥候組나 偵察隊라고 할수 있으며 이러한 偵察隊를 출동시킬때에는 이들을 掩護하고 危急狀況을 당했을때 긴급히 구조하고 지원할만한 태세를 갖추어야 하는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단지 高速일뿐 輕武裝의 高速艇 2척을 출동시키고 이를 掩護할 本艦인 哨戒艦이 艦砲의 有效射距離밖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初期對應失敗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진상보고발표전에 이미 전해진바 있기는 해도 그러한 作戰錯誤가 왜 발생하게 되었느냐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나 엄중한 지적없이 사태발생후 哨戒艦이 현장에 접근하려 했으나 漁民들이 바다속에 설치한 漁網을 피해가느라고 全速航海할수 없었다는 발표내용도 初期對應失敗의 責任을 어민에게 돌리려는 卑怯하고 얄팍한 責任回避가 아니고 무엇인가.
奇襲攻擊을 가한 北韓警備艇은 火焰에 쌓였고 우리 高速艇은 沈沒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北韓艦艇의 미사일과 沿岸미사일의 作動徵候가 포착되어 越境膺懲擊沈을 자제했다는 것도 그동안 간혈적으로 나온 상황보도와 맞지 않는다. 상황이 진전되고 있을때 北韓의 艦對艦미사일과 地對艦미사일의 作動徵候가 포착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동안의 보도였다. 물론 그같은 보도가 공식적으로 확인 발표된 것이 아니라 슬그먼히 흘린 내용을 줏어듣고 쓴 仄聞記事여서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고 해도 어딘가 찜찜하다. 火焰에 휩싸여 피해가 莫甚한것으로 보았던 北韓의 挑發警備艇은 침몰되지 않은채 도망치는데 성공했고 그보다 피해가 덜하다고 판단한 우리 高速艇은 예인중 침몰했다. 직격탄으로 操舵室이 날아간 高速艇의 피해가 침몰되기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고 北韓側이 더 피해를 당했다고 판단한 것이 중대한 착각이었다.
이번 사태가 北韓軍의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挑發이었으나 기습공격을 당했어도 『확고한 戰鬪意志와 신속한 對應으로 北方限界線(NLL)을 사수한 작전』이었다는 결론을 내린 국방부조사보고는 北韓警備艇의 승무원 50명중 30여명을 사상시킨 전과를 거두었다고 추정했다..
그렇다면 우리海軍은 西海交戰서 승리했다는 것인가? 정말 그럴까?
海戰에서는 艦艇의 침몰여부가 가장 중요한 승패의 기준이다. 단발에 操舵室이 날라가고 高速艇 한척이 침몰한 쪽이 이겼다고 할수 있을까? 사망을 엉뚱하게 사상으로 잘못 알아들은 해군이 최근접거리가 400m나 되었던 북한경비정의 승무원피해를 어찌도 그리 정확하게 헤아렸는지...,그것도 우리측의 인명피해보다는 한명이라도 많은 30여명으로 말이다. 치솟는 불길과 자욱한 연기속을 꽤뚫어 보는「 눈」과 멀리서도 정확하게 헤아리는 「숫자감각」이 놀랍기만 하다.
이번사태를 西海交戰이라고 부르는 것도 정확치 않은 호칭이다. 北韓側이 NLL을 불법으로 越境하여 奇襲攻擊을 폈으니 西海越境挑發이라고 해야 정확하고 너무 길다면 越境을 생략하고 西海挑發이라고 하면 되는데 왜 西海交戰이라고 하는가. 金正日의 心氣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햇볕政策의 細心한 配慮라면 呼稱부터 잘못되었다.
7일(일요일)아침 KBS-1TV를 보니 젊은 學者인지 學徒인지 알수없는 몇명이 나와서 이번 서해사태에 관해 분석하는데 世宗硏究所硏究員이라는 한 「御用쓰레기」가 말하기를 金正日이 경제건설을 최우선과제로 삼고 해외협력사업추진에 주력하는 것으로 보아 이번사태에 평양의 핵심부의 의도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해괴한 논리를 펴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번 사태는 얼떨결에 저지른 저들의 우발적인 「自殺골」로 여겨지며 金剛山觀光등 民間交流는 계속해야 하고 어렵게 造成한 햇볕政策의 基調를 그대로 소중하게 유지하며 北韓에 대한 經濟支援도 중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强辯하는것이었다. 8일아침 朝刊新聞에도 정부는 『西海事態가 사전에 계획된 도발이 확실하지만 金正日등 北韓指導部의 介入여부는 불분명하다』고 잠정결론을 내리고 사태의 조기수습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실로 어처구니없고 정신나간 착상이다. 金正日의 指示나 承認, 介入없이 軍部가 멋대로 이번 일을 계획했고 어쩌면 일선지휘관이 불장난을 쳤을지도 모른다? 北韓社會가 그정도로 자유스럽고 현장책임자의 裁量으로 움직이는 社會란 말인가. 몰라도 한참 모르는 Orl이고 알고 그런다면 너무도 무책임하고 欺瞞的인 자세다. 死亡을 死傷으로 잘못보고받은 現場指揮官보다도 더 형편없는 발상. 주어터지고 몇사람 죽어도 계속 퍼주고 갖다 바치고 하는 것이 南北和解이고 韓半島平和이며 共存이란 말인가
유창선: 오선배님의 글을 보고서야 우리 안동교회가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이유를 알겠읍니다. [07/10-13: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