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압록강에 첫발을 딛고 맑은 물을 수통에 담고 있는 국군용사. 10월26일 오후5시50분, 6사단 7연대 수색대가 함경남도 혜산진에 도착하여 압록강물을 떠올렸다. 전쟁고아 난민 피난대열![]() 전쟁발발과 함께 포화를 피해 피난길에 나선 일가족이 남북분단의 패말앞에서 갈길을 찾고 있다. ![]() ▲유엔군의 대반격으로 1950년9월28일 서울이 수복되었으나 집과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가 전란의 참상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 ![]() ▲포화로 잿더미가된 페허에서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전쟁고아소녀 ![]() ▲피난길에 나선 어머니가 여인이 봇다리를 지고 등에 업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 ▲피난길에 지친 한가족이 난민수용소에서 연합군이 배급한 급식으로 허기를 떼우고 있다. ![]() ▲자매로 보이는 어린 두소녀가 잃어버린 부모의 사진을 들고 들판을 헤매고 있다. ![]()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하여져 연합군이 흥남항을 통해 철수하게되자 흥남부두에 몰려나온 피난민들이 `유엔`군의 `LST`를 다투어 타고 있다. 이 사진은 미공개기록사진 중의 하나다. ![]() ▲철수함정을 타려고 흥남부두에 쇄도한 북한동포들 - 1950년 12월12일 철수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약10만명의 북한동포가 해상을 통해 남쪽으로 탈출했는데 사진은 이 때의 광경이다. 수십척의 함정이 동원되어 이루어진 이들 수송은 한국과 유엔군의 철수 못지않게 대규모적인 것이었으며, 큰 기적을 이룬 작전으로 유명했다. ![]() ▲6·25전쟁 중 인천항에 정박해 있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승선정원이 59명에 불과했으나 흥남철수작전에 참가하여 피란민 1만4000명을 자유의 품으로 실어날랐다. 1만4000명의 피란민은 물도 약도 없이 3일간의 항해 끝에 부산항에 닿았다. ![]() ▲국군의 소개명령이 내려지자 지게나 소가 끄는 수레에 가재도구를 싣고 남쪽으로 향하는 피란민 행렬 ![]() ▲폐허속에서 노숙하는 전란민 가족(1950년 9월) ![]() ▲완전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시가와 전쟁난민들(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 당시) ![]() ▲북한동포의 목숨 건 남하 행렬 - 1950년 12월4일 평양을 철수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북한동포들은 이렇게 부서진 대동강 다리를 결사적으로 건너 남하하기 시작했다. ![]() ▲서울시민들 - 51년 1. 4 후퇴때 서울시민들이 철도에서 피난하고 있는 모습 - 이고...지고..피란행렬. 51년 1.4후퇴 때 서울시민들이 철도를 따라 피란하고 있다. 피란보따리 위에 어린이가 앉아 있는 모습도 보인다. ![]() ▲피난민이 몰려든 임시수도 부산의 거리거리담젹에는 난민들의 노숙을 막기위해 금지표시가 나붙었다. ![]() ▲한국전쟁 때 거제도에 도착한 흥남철수 당시의 피난민 모습 ![]() ▲임시수도 부산의 천막촌. 1951년 2. 한국군의 대응, 후퇴와 반격 38선돌파 북진![]() ▲드디어 38선(한탄강)을 돌파하고 북진중인 육군용사들. ![]() ▲전선으로 긴급 출동하는 국군 기병대. ![]() ▲학도병 전선투입 -남침한 인민군을 격퇴하기 위해 고교생과 대학생들이 자진입대하여 기초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채 전선으로 전격배치되었다. 몸에 맞지않는 군복과 누비담요, 소총등으로 무장한 모습이 아무래도 어색하다. ![]() ▲삽으로 푸는 가마솥밥 -전선의 노천식당에서 국군 취사병들이 임시로 가설한 가마솥에 밥을 지은 뒤 소쿠리에 퍼 담고 있다. ![]() ▲인천상륙작전에 참가중인 해병대 - 1949년에 제주도에서 창설되어 6.25개전이래 곳곳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한국해병대는 1950년 9월15일 UN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상륙용 주정에서 아군의 함포사격으로 검은 연기 싸인 기슭을 바라보면서 상륙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 ▲<한국전쟁-인천상륙작전> 서울에 돌입한 국군선봉대 - 패주하는 인민군을 쫓아 직격을 거듭한 상륙 동진부대 국군과 un군은 9월15일 드디어 한강을 건너서 26일까지 인민군을 완전 소탕, 서울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 ▲38선상의 간이 아치.(1950) 38선돌파 기념으로 우리 국군들이 세운것임.(게재/등록일 : 19501001) ![]() ▲평양공략을 위해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는 국군1사단 장병들 - 평양 제2의 관문인 보통문이 보인다.(1950.10.17) ![]() ▲1950년 10월 아침. 평양입성...평양. 화신앞 모란봉 가는길. 신상철(7사단장)씨와 함께 인민군의 말을 타고 찍은 모습. ![]() ▲국군 입성을 환영하는 함흥 시민들.(1950.10.18) ![]() ▲압록강변에 감격의 태극기 - 1950년 10월26일, 국군 선봉대 용사들이 만주를 눈앞에 바라보는 압록강 기슭 혜산진에 도달하여 감격에 벅차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고창하고 있다. ![]() ▲북한 출격 - 북한의 상공에서 공격을 감행하는 공군기. ![]() ▲우리공군기의 출격 - 미군으로부터 양도받아 공군사상 최초로 전선으로 출격하는 무스탕 전투기편대 ![]() ▲우리 공군기의 출격 - 미군으로부터 양도받아 공군사상 최초로 전선으로 출격하는 F-51 전폭기들 ![]() ▲한국전쟁중 국군을 위문하고 있는 연예인 3.기습남침으로 국군을 압도한 인민군![]() ▲출격 준비 - 북한 공군조종사들이 긴급 출격을 위해 소련제 야크18 전투기에 오르고 있다. 미군의 참전으로 인민군이 제공권을 빼앗긴 시점이 50년 7월10일경이라는 점에서 이 사진은 이 해 6월말에서 7월초까지의 북한공군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추정된다. ( ■ 자료출처 : 톨스티코프 ) ![]() ▲개전초기 한국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인민군 전차 ![]() ▲탱크를 앞세우고 남으로 밀고 내려오고 있는 인민군. 러시아는 구소련시대부터 북침설을 공식적으로 지지해왔으나 최근들어 중립적인 입장으로 바뀌었으며 다시 남침설이 등장하고 있다. ![]() ▲인민군 탱크들 - 1950년 6월 28일 中央廳을 거쳐 南大門을 향하여 달리는 인민군 탱크들. 뒤에 서울市廳이보인다. ![]() ▲6.25 남침하의 서울에서 이른바 `의용군`으로 끌려가는 장정들. ![]() ▲6.25 전쟁때 서울 시가지를 통과하는 T-34-85형 인민군 탱크. 중량32t, 최대시속 50km, 승무원 4명으로 인민군 전력의 핵심이었다. 4.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정전-상처와 아픔만...![]() ▲휴전선을 긋는 순간 - 유엔군 연락장교 제임스 레이 대령(왼쪽)과 인민군 연락장교 장춘산(오른쪽)이 판문점에서 휴전선을 정하는 협정을 시작하고 지도에 선을 긋고 있다.(1951.11.26) ![]() ▲1953년 7월 27일 하오 10시 정각부터 12분간에 걸쳐 조인된 정전협정문의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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